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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날리는 흙먼지와 건조하고 무더운 날씨, 그 곳은 황량한 사막이었죠.”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에티오피아에 대한 김정현(45) 씨의 첫인상이다. 김 씨는 2006~2009년, 2012~2013년 등 두 차례에 걸쳐 5년간 에티오피아에서 봉사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김 씨는 첫 3년간의 에티오피아 생활을 잊을 수 없다. 성취감과 행복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봉사활동은 남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해 준다”며 “해외에서의 활동은 국격을 높였다는 점에서 자부심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봉사활동을 한 곳은 오르미아주의 주도인 나자렛. 지역언어인 오르미아어로 하면 ‘아다마’인 나자렛은 에티오피아 제2의 도시다. 인구는 25만명가량.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남짓 달려야 도착한다.

김 씨는 나자렛의 아다마 직업훈련대학(Adama TVET College)에서 기술 교육을 담당했다. 그의 전공이 기계 분야였기 때문이다. 교육 프로그램은 공작기계 및 가공방법, 유지보수 등으로 짜여졌다. 하지만 실습장을 보곤 한숨부터 나왔다. “대학 건물 안과 밖은 온통 먼지로 가득하고, 건물 외벽은 페인트 칠도 하지 않은 상태였죠. 기계 실습장에는 노후화된 러시아산 기계장비들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선반 4대, 밀링 2대, 평면 연삭기 1대 등이 있었는데 그나마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선반 1대와 수평 밀링 1대 정도였죠. 난이도에 따라 다양한 기계 가공 기술을 교육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어요.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죠.”

실습 장비의 노후화에 이어 김 씨는 또 다른 난관에 부딪쳤다. 학원(Institute)이었던 김 씨의 학교가 전문대학(College)으로 승격하면서 몇 개의 과정이 신설됐는데, 이 과정을 운영하기 위한 교육 실습 장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 씨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하 코이카)이었다. 코이카의 현장지원사업(3만 달러 규모)으로 학생과 교사들을 위한 CAD/CAM 실습실(Lab)을 설치한 것. 김 씨는 “새로운 실습실에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이들을 보면서 한국이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틈틈이 지역봉사도… “성취감·행복감 동시에 맛볼 기회”

 

김 씨는 다른 봉사단원과 함께 지역봉사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집 수리 등 힘든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빗물이 새는 한 가정에 낡은 함석지붕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집 내·외부를 페인트로 도색하니 새집 같았죠. 솜센(Somsen)의 가족들이 행복해하며 감사의 미소를 보내주는 데서 봉사활동의 참맛을 느꼈어요.”

그는 해외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보은’이라고 설명한다. 고등학교 대신 들어간 직업훈련원이 해외 원조로 지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벨기에의 원조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설립된 창원직업훈련원에서 3년간 기술 교육을 받고 취업했어요. 당시에는 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못 느꼈지만, 나이가 든 후 벨기에의 도움으로 ‘지금의 나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가진 기술로 어려운 나라의 젊은이들이 도움을 받게 된다면 그들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고맙게 생각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인연이 코이카의 해외 봉사활동에 참여하도록 만들었죠.” 김 씨가 다닌 직업훈련원은 한백(한국·벨기에) 창원직업훈련원으로, 벨기에의 지원으로 설립됐다. 박근혜 당시 이사장과 벨기에 왕국 알베르 왕제가 공동 설립자이다. 박 대통령은 최근 유럽 순방 중 벨기에를 찾았고 알베르 2세 전 국왕의 아들인 필립 국왕을 만나 한백직업훈련원을 언급하기도 했다. 김 씨는 “떠나올 때 에티오피아가 ‘희망의 땅’이 돼 가고 있다고 느꼈다” 며 “교육이 이들의 빈곤 탈출에 ‘희망’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