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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가 장기 불황을 통과하며 살아날 조짐을 보이지만 상당수 한국의 주력 산업은 신음하고 있다. 해운과 조선업은 구조조정을 해야 할만큼 체력이 약해졌고 자동차 산업도 주춤하는 모양새다. 대외 환경도 악화 일로다. 그러나 한국의 산업정책은 실종 상태다. 정권마다 신성장동력 육성을 외쳤지만 10~20년 후 대한민국을 먹여살릴 믿음직한 신산업은 보이질 않는다. 신음하는 기존 주력산업에 대한 청사진도 없고, 실체를 모르는 4차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만 무성하다.
 

바이오에 사업 경험이 전혀 없던 삼성그룹은 지난 2011년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세웠다. 바이오시밀러(바이오 복제약) 위탁생산(CMO) 기업인 이 회사는 글로벌 제약사들과 잇달아 계약을 성사시켜 올해 1분기 창립 6년여만에 첫 흑자를 기록했다. 연구개발 전문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최근 미국에서 자체 개발한 바이오시밀러의 판매 허가를 받았다. 이 약은 글로벌 제약사인 머크(MSD)가 판매할 예정이다. 세계 바이오 시장에서 존재감이 없던 한국이 단숨에 주목을 받게 됐다.

바이오 산업은 정부마다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던 분야다. 연구개발(R&D) 예산을 집중하고 육성책을 내놓은 것만 10여년이 된다. 하지만 삼성의 성공에 정부 기여는 거의 없었다. 월등한 정보력과 자본력을 갖춘데다,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바라보고 사업을 진행한 터라 정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임상시험은 전부 해외에서 했다.

정부의 도움으로 성공한 글로벌 바이오 기업은 있을까. 아직 없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1999년부터 나노 등 16개 분야를 선정해 10년 동안 각각 1000억원을 지원한 21세기 프론티어사업, 이후 생긴 글로벌 프론티어사업에서 아직 제대로 사업화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R&D 예산을 집중할 분야를 정하는데도 미래창조과학부는 9대 유망기술을 선정하고, 비슷한 시기 기획재정부는 11대 신산업을 따로 선정하는 등 엇박자도 심각하다. 정부의 신산업 육성 정책은 과연 필요한 걸까.

바이오가 떠오르는 동안 가라앉은 산업도 있다. 세계 7위 컨테이너선사인 한진해운은 지난해 청산이 결정됐다. 해운강국 한국은 옛말이다. 세계 1위 선박수주잔량을 자랑하던 대우조선해양은 세금먹는 하마라는 오명을 쓴지 오래다. 국가 기간산업이 무너지는데도 시장 논리만 앞세우는 정부를 보며 산업정책이 사라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산업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 주도로 신성장동력을 육성하는 공격형 산업정책을 지양하고, 오히려 주력산업을 재점검해 대외적으로 어떤 충격이 와도 버팀목이 되도록 경쟁력을 키우는 방향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 전통산업에 더 공들이는 글로벌 강국들

한국은 기존 주력산업은 민간 영역, 즉 시장에 맡겨두고 정부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신산업 육성에 산업정책의 초점을 맞춘다. 반면 선진국들은 전통산업을 중시하는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쓴다.

영국의 테레사 메이 총리는 2016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투표 가결에 대한 대책으로 산업정책 카드를 꺼냈다. 지난 1월 발간한 ‘산업 전략 수립 녹서(Building Our Industrual Strategy: Green Paper)’ 보고서에는 정부가 뒤떨어진 산업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선도적인 산업 부문을 육성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미국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크라이슬러, GM 등 주요 자동차회사들을 직접 살렸다. 한국 정부가 한진해운과 대우조선 처리 과정에서 시장 논리만 앞세운 것과는 대비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제조업증강법’(2010년), ‘미국혁신전략’(2011년), ‘미국경쟁력강화법’(2014년) 등으로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펴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친환경 에너지(신산업)이 아닌 전통 에너지 산업을 중시한다. 애플의 휴대폰 공장 등을 미국내로 돌아오도록 하는 등 제조업 우선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2012년 ‘인더스트리4.0 작업반’을 구성하고, 2014년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제조업 혁신 전략을 발표했다. 핵심은 독일 기업이 가지고 있던 제조업 경쟁력에 IT를 결합해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자는 것이다. 기존 주력산업을 고도화하는 정책이 산업정책의 핵심인 셈이다
 

◆ 주력산업 손놓은 한국의 산업정책…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져

한국은 과거 20년 동안 눈에 띄는 산업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일어난 생산성 정체는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정부와 산업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 등에 따르면 지난 2011~2015년 중 우리나라의 연평균 잠재성장률은 10년 전인 2001~2005년(4.7%)보다 1.5%포인트 하락한 3.2%였다. 

부문별 기여도를 보면 총요소생산성의 기여도가 1.5%, 자본기여도가 1.5%, 노동기여도가 0.2%를 각각 차지했다. 총요소생산성의 기여도는 지난 2001~2005년 평균 2.5%에서 2011~2015년에는 1.5%로 1%포인트 감소했다. 같은 기간 자본기여도가 2%에서 1.5%로 0.5%포인트 감소한 것에 비해 감소세가 컸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이르면 5년후 1.8%까지 추락할 것으로 전망한다. 

강인수 현대경제연구원 원장은 “산업측면에서 보면 잠재성장률 하락은 과잉 생산, 낮은 생산성, 기술경쟁력 개선 미흡 등에 따라 생긴 제조업의 위기가 초래한 결과”라며 “서비스업이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새로운 산업이 아닌 유휴노동력을 흡수하는 완충섹터로 인식돼 여전히 부진한 점도 일조했다”고 설명했다.

◆ 역발상이 필요한 시기...공격형보다 수비형 산업정책 펼쳐야

산업정책이 제대로 서지 못하니 위기때 대응이 정연하지 못했다. 한진해운이 퇴출되는 해운업의 구조조정과 대우조선 등에 대한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는 시장논리만으로 일관했고, 국가의 미래를 감안한 산업정책을 보여주지 못했다.

신산업 육성 정책이 성공한 것도 아니다. 내수 시장이 작다는 한계가 있는데다, 민간이 이미 정부를 앞선 경우가 많은 탓이다. 정부의 정책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소멸한다는 점도 정부 주도 신산업 창출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녹색성장 전략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각종 이해관계를 조율하지 못해 서비스업 육성도 10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결국 한국이 그동안 추구한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 전략이 성공하지 못한 셈이다. 

정부 내부에서도 ‘공격형’ 산업정책을 탈피하고, 기존 주력산업을 경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만드는 ‘수비형’ 산업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4차산업혁명 등 빠르게 움직이는 분야에는 최첨단을 달리는 민간 대기업 등이 달라붙어 새로운 출구와 먹거리를 찾도록 하고 정부는 기업 하나로 다수가 먹고사는 조선업 등 주력산업을 다시 진단하고 살릴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미다.

중국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보복을 하고,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검토를 천명하는 등 국제정세가 심상치 않다. 그동안 국가간 장벽은 계속 낮아지는 것으로만 가정했지만,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한국이 최악의 상황을 맞딱뜨려도 버티려면 경제 파급효과가 큰 기존 주력 산업들이 튼튼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재부 한 관계자는 “지배구조와 승계문제, 일감몰아주기 문제 등 불평등과 관련된 문제를 먼저 과감하게 해결해 정부가 특혜 시비로부터 자유로워진 다음, 기간산업으로 판단된 산업에는 지원책을 포함해 적극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공무원이 정책을 과감하게 쓸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A 국책연구원 고위 관계자는 “정권은 5년마다 바뀌는데 경기는 다른 주기로 순환한다. 누가 제대로 의사결정을 하려고 나서겠는가”라며 “의사결정을 투명하게 하고 책임은 묻지 않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